사할린과 사할린 한인의 역사

  • 사할린은혜중앙
  • 조회 1502
  • 2004.09.01 00:00
사할린 주의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 자연에 대해서

  명칭은 러시아 연방 사할린 주로 러시아의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할린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44-1645년경이다. 제정 러시아 국기가 게양된 때는 1806년 10월이고. 제정 러시아 시대 1886년부터 1906년까지 사할린 섬은 유형지로 사용되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되었다. 러시아에 사할린 섬이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인 안톤 체홉이 1890년 이곳 사할린을 답사하고 난 후 집필한 <사할린 섬>에서 사할린 섬을 지옥으로 표현하면서부터였다.

  사할린 주를 크게 나누면 사할린 본 섬과 캄챠카 반도의 끝과 일본의 홋카이도 섬을 활처럼 연결하는 쿠릴열도로 나눌 수 있다. 위도상으로는 대략 북위 43.5-52.6도. 동경 141-146도 사이로 사할린섬의 남쪽은 우리나라 북단인 북위 43도의 함경북도 온성과 맞닿아 있다. 남쪽으로는 일본 홋카이도 섬과 40Km 거리에 있고. 서쪽으로는 연해주와 하바롭스크와 마주 보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는 비행 시간 2시간 30분 거리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면적은 남한 면적의 86%에 해당하는 86.000 평방미터이나 그중 사할린 본 섬은 76.000 평방미터를 차지한다. 남북의 길이가 길고. 동서의 폭은 좁은 연어 모양의 기다란 화산도이다. 남북의 길이가 약 1.000Km에 달하는데. 동서의 폭이 가장 좁은 곳은 32Km 밖에 안돼는 곳도 있다.  섬의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완만한 구릉성의 산지와 사이사이에 개간되지 않은 잡초가 무성한 평지로 되어 있다. 쿠릴 열도는 캄챠카 반도에서 일본의 홋카이도에 이르는 호상열도로 화산작용에 의해 이루어졌고.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해 있어 화산과 지진 활동이 심하다.

  기후는 냉대 기후로 겨울이 길고(약6개월: 11월 중순-5월 중순. 평균 기온 영하 20-25도). 눈이 많으며. 기온은 비교적 낮은 편이나 해양의 영향으로 그리 춥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습기가 많고. 섬이므로 바람이 많으며. 기후변동이 심한 편이다. 대륙에 비해 산소량이 부족하다는 기후학자의 보고가 있다.  봄. 여름. 가을은 짧고 서늘하여 피서지로 알맞으며. 농업으로는 고랭지 채소와 낙농만이 행해질 뿐이다. 대신 임산자원과 지하자원. 기타 나물류. 약초류 등이 흔하다.

  사할린 주의 면적은 남한 만한 면적이나 인구는 약70만으로 인구밀도가 8명이다. 우리나라 인구밀도 450명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세계 4대어장 중 하나인 북서 태평양 어장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사할린 바다는 수산자원과 천연가스. 석유등의 보고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개발 전망이 밝으며. 이미 선진 각국이 들어와 가스 개발과 원유 시추에 경쟁적으로 열을 올리고 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동향

(1) 사할린 한인의 이주: 우리 동포가 사할린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1863년 북 사할린 지역인 우스리스크 지역에 13가구가 살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가1897년엔 코르사코프 지역에 67명이 살았었고. 1905년 러일전쟁 후 사할린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러시아령 이었던 북위 50도 이북에 1923년도 1.431명의 조선인이 살았었으며. 그후 그들이 러시아 당국에 일본의 첩자로 오해되는 바람에 1937년도 강제 이주 당하거나. 일본령이었던 남 사할린으로 넘어와 살게 되었으므로 1945년 해방 당시에는 북 사할린에는 한인이 몇 명 남지 않았었다.

  한편 남 사할린에는 1920년에 934명. 1934년에는 5.813명이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할린에 한인수가 갑자기 늘어나게 된 것은 1939년 이후로 1939.9-1942.2까지는 자유모집으로. 1942.2-1944.9까지는 동원모집으로. 1944.9-1945.봄까지는 강제징용으로 약60.000명이 사할린에 와서 살았었다고 한다. 

(2) 사할린 한인 거주 분포

  전체 인구 약70만 명 중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다음으로 많은 43.000여명이 살고 있다. 전체 한인의 3/4은 주 수도인 유즈노 사할린스크시에 살고 있다. 그외 코르사코프. 홈스크. 뽀로나이스크. 마카로브. 우글레고르스크. 샥조르스크. 크라스나고르스크. 또마리. 체홉. 네벨스크. 고로노자보르스크. 브이코프. 돌린스크. 아니바. 띠모스크. 스메르니히. 노글리끼. 바프로쇼프. 와스톡 등과 같은 인구 수 차례로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데 영주귀국 프로그램에 의거 사할린 한인 1.2세 노인들의 영주귀국이 실현된 이래 60세 이상의 노인층의 인구비율이 현격히 줄었다.

(3) 사할린 한인의 중요성

  이곳 동포들은 러시아식 교육을 받아 가치관과 행동양식 등 삶의 제반양식이 한국인과 서로 상통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한국인 특유의 기질과 문화의 동질성이 남아 있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관습에 있어서도 아직도 한국적인 것이 많이 남아있다. 그리하여 한국적인 것을 심고 가꾸면 얼마든지 한국인으로서의 정통성을 갖게 할 수 있고. 러시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데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

(4) 사할린 한인의 경제생활

  공산치하의 한인들은 대부분 탄광이나 국영농장. 건축현장 등에서 일하였으며. 사무직이나 공무원으로 일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민족차별이 심했었기 때문이다.  90년도에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난 후 시장경제로 바뀌면서 근면한 한인들의 생활은 시장에서. 농장에서. 바닷가에서 점차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5.6년 전만 해도 많은 한인들이 변두리의 허름한 개인주택에서 살았었으나. 현재는 시내의 많은 아파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한인들의 경제적 실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5) 사할린 한인 모국방문 및 영주귀국 현황

  1995년 강제징용에 따른 사할린 한인 배상요구에 한국. 일본. 러시아 정부가 합의하여 모국방문(1945년 이전 출생자에 한하여 1주일간 모국 방문하도록 함. 현재 135여 회 째-1회 70여명. 1만 여명이 모국방문 하였음.)과 인천 연수동 요양원 건립(100명수용 요양원을 건립하여 1998년 입주)과 안산시에 영주귀국자 아파트 건립(1.000세대 986명. 2000년2월26일 입주)이 이루어졌다. 사할린 잔류한인들을 위하여서는 인도적 차원에서 사할린에 한인문화센터를 건립할 계획 중이다.

(6) 사할린의 전망

  일본은 벌써부터 사할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자국민이 거의 없는데도 T.V를 이용한 일본어 교육. 문화원 개설 등에 열심하고. 사할린 자연. 자원 조사 연구팀을 파견하고 있으며. 홋카이도와 사할린간의 지하철도 연결. 대륙과 사할린간의 연륙교 건설 등에 대해서 협의하는 등 적극적이다. 우리나라는 43.000여명의 동포들이 이 섬에 살고 있지만 거의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실정임을 감안할 때 안타깝다. 선교적으로 사할린 한인 선교는 러시아 선교의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다. 바울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발판으로 세계선교에 이바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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